방과 후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으며 학습지 몇 장을 푸는 걸 빼곤 특별한 일정 하나 없던 유년시절. 문구사가 가지는 의미는 더없이 특별했다. 동네 친구들과 암묵적으로 약속한 만남의 장소이자, 집 열쇠가 없는 날이면 가장 재미진 시간을 보내며 엄마를 기다릴 수 있는 이웃집이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문구사엔 정말 없는 게 없었으니까.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이 그곳에 있었다.
여름이 좋다고 처음 생각한 건
여름문구사란 이름이 지어진 건 주인장의 유별난 여름 사랑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 해질 때까지 놀다 들어가면 엄마의 잔소리를 실컷 들었어야 했어요. 근데 겨울에는 해가 너무 짧아서 조금만 놀아도 많이 놀고 온 것처럼 여겨지는 게 억울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 처음 해가 긴 여름이 좋다고 처음 생각한 것 같아요. 또 여름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있어요. 물놀이, 조개 잡기, 수박, 옥수수, 나무, 풀, 저렴한 채소들, 일이 끝난 후 시원한 맥주를 마시려고 열심히 일하는 제 모습, 모두 활기가 넘치는 느낌인지라 좋습니다. 여름은 언제나 좋아요.”
불량식품은 영원하다
여름문구사는 제주 관광 기념품과 ‘안 팔리면 내가 가져야지’ 하는 물건들로 꾸며진 공간이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동네 꼬마, 어른 할 것 없이 찾아온다. 관광객이 주를 이룰 거라는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동네 꼬마 손님들도 있을 만큼 인근 초등학생 사이에서 특히나 핫한 장소가 되었다. “맥주 사탕, 아폴로, 테이프 과자 이런 것들. 모두 추억을 떠올리며 어른들이 사 먹겠지 하며 가져온 건데, 어린 친구들이 좋아해서 당황했어요.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어린 친구들이 좋아해 주니 뿌듯하기도 해요. 불량식품은 영원하다. 이런 생각도 들고. 하교 시간인 4시쯤이면 매일같이 오는 친구들이 있는데요. 그 친구들이 오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해요. 문구사에 뭐가 들어오면 좋겠느냐, 봄 소풍은 언제 가냐, 요즘은 어떤 가수를 좋아하냐 등등(웃음). 소파에 앉아 놀다가 가라고 하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엿듣기도 하고(웃음).”
롤러스케이트
여름문구사엔 오래된 것들이 많다. 모두 누군가 쓰고 남겨둔 것 혹은 버려둔 것, 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다. 주인장은 익숙하고 사연이 있는 것들에 특히 마음을 둔다. 현재 여름문구사의 자리엔 원래 농약사가 있었는데, 그 당시의 간판을 여전히 유지해둔 것 역시 그런 연유에서다. 오래된 찬장과 테이블, 지인이 가게를 접으며 선물해 준 한라우유 냉장고,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옛날 관광지도와 빛바랜 롤러스케이트, 모두 그만의 멋을 가지고 있다. “롤러스케이트는 좀 특별한 사연이 있어요. 예전에 한 손님이 자기가 사는 동네에 되게 오래된 문구사가 하나 있다고 추천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쉬는 날 그 문구사에 찾아가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사 왔죠. 저 롤러스케이트도 그때 데려온 거고요. 그러고 며칠쯤 지났을까, 관광객 커플 한 쌍이 오셨는데, 진열해둔 롤러스케이트를 보시고 놀라서는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저 롤러스케이트 어디서 났냐고요. 저게 오래전 망한 자기 할아버지네 회사에서 만들던 건데, 어떻게 여기서 볼 수가 있냐며(웃음).” 이후로 롤러스케이트의 판매 여부를 묻는 손님들이 종종 있었지만, 판매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격을 붙이기가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일종의 여름방학 계획표
주인장에게 여름방학 동안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아이들이 방학을 맞이하면 단골 친구들과 함께 장난감 벼룩시장을 여는 것. 도시에선 아이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벼룩시장이 종종 있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아무래도 접할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름문구사에서 조촐하지만 귀여운 벼룩시장이 열린다면, 장난감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게 본분인 아이들도, 여전히 그 시절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어른들도 모두에게 즐거운 하루가 될 것이다.
the bom volume 05 <Classic Summer> '어릴 적 나의 꿈은 문구사 집 딸이었다' 중에서
글 라어진 / 사진 김보경